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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media

일본 역대 최악의 메이레키 대화재,
수도 도쿄의 마중물이 되다!

전화위복이란 말만큼 상투적인 말도 없다. 지루한 훈시 같은 이 말은 우리가 살며 저지르는 온갖 실수와 잘못 후에 그것을 덮고 잊어버리려는 심리와 함께 작동할 때가 많다. 하지만 역사라는 긴 숨으로 전화위복을 되새겨보면 이처럼 뼈저리는 교훈도 없을 것이다. 역사를 뒤흔든 큰 사건 이후 그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그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례들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 대한민국과 363년 전 일본 에도에서도 관통하고 있는 진리다.

1657년 일본 에도에서 발생한 메이레키 대화재는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1666년 런던 대화재와 함께 세계 3대 화재사건으로 꼽힌다. 일본 역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화재 사건인 메이레키 대화재는 도시의 60%를 잿더미로 만드는 재앙을 안겨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에도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거대도시이자 지금 일본의 수도인 도쿄로 성장하게 되는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다. 자, 그럼 시계추를 돌려 에도로 함께 떠나 메이레키 대화재의 발생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성장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이에야스의 선택, 에도막부

17세기에 그려진 에도 병풍그림. 구름을 상징하는 금박장식 아래 에도성을 중심으로 촘촘히 들어선 시가지가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Wikimedia

160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쇼군에 등극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럽과의 무역이 큰 부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미 존재했던 무역로를 통제해 그 이익을 독점하고자 했다. 이에 당시 유럽인들이 선호했던 규슈와 수도였던 교토가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던 에도에 대대적인 성 증축을 감행하며 에도막부의 시대를 열었다. 이 공사는 3대 쇼군인 이에미쓰가 집권하던 1636년까지 2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되며 에도를 일본의 정치, 경제, 외교,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한다.

이 기간 에도의 주민은 민간인 15만 명과 사무라이계층 50만 명을 합쳐 약 55만 명으로 증가했다. 에도성을 중심으로 다이묘들의 대저택, 사무라이 거주 구역, 서민 구역, 사찰지역 등으로 이뤄졌고, 사무라이들의 소비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상인과 장인들이 모여 있는 시가지가 집중화되고 있었다.

에도 병풍그림 속의 에도성과 천수각 ⓒWikimedia

이렇게 개발을 거듭하던 에도는 메이레키 대화재 시기에는 주민 28만 명, 사무라이 40만 명, 합계 약 70만 명에 육박하는 거대도시가 된다. 이런 급작스러운 인구팽창으로 인해 에도는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며 도시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652년 순찰보고서를 보면 쇼군 직속의 가신들 중 집이 없는 이들이 600명에 이를 정도로 택지가 부족했는데, 이는 그만큼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 막부의 상인 통제정책에 의해 전국의 상인들이 몰리면서 다닥다닥 붙은 연립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해 인구밀도가 급격히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불의 도시, 에도

에도는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세 도시인 교토, 오사카와 비교하여도 유달리 화재가 많이 발생하는 도시였다. 그 이유는 겨울에서 초봄까지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매서운 계절풍과 초봄이나 초가을 강한 저기압에 ‘마파람’이 불어 비가 거의 내리지 않고 바람이 매우 거셌기 때문이다. 실제 1590년부터 메이레키 대화재가 발생하기까지 67년간 에도는 총 140건의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1661년 출판된 무사시 아부미의 목판 인쇄물. 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 당시 불길을 피하려는 에도 시민들. ⓒWikimedia

더욱 문제인 것은 이렇게 빈번히 화재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에도의 소방체계가 전국시대의 전근대적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에도의 소방체계는 크게 다이묘 소방과 민간 소방으로 나눌 수 있다. 1643년 시행된 다이묘 소방제도는 각 다이묘가 1만석 당 30명씩의 소방인력을 동원해 소방활동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다이묘 16가문이 420명으로 구성된 팀 4개를 편성해 열흘간 교대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이묘들은 화재 진압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고 더구나 불과 1년 만에 그 규모가 10가문 3개 팀으로 축소되기까지 했다.

민간의 소방은 대부분 화재 시 소화를 강제하거나 처벌하는 규정으로 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 에도막부는 사무라이 계층과 서민 계층을 엄격히 구분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사무라이, 상인, 서민 등 각 계층은 자신의 구역에서만 소방활동을 펼쳐야만 했다. 한 예로 1655년 민가에서 발생한 화재에서 다이묘들은 에도성과 사무라이 가옥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판단해 출동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예견된 재앙, 에도를 삼킨 대화재

ⓒWikimedia

1657년, 연호 메이레키 3년 새해 벽두부터 적잖은 화재들이 발생했지만 큰 불로 이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80일 이상 비가 내리지 않아 대기는 매우 건조했고 1월 17일부터 북서풍이 불기 시작해 다음 날 아침에는 한층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메이레키 대화재는 1월 18일(양력 3월 2일)부터 20일에 걸쳐 발생한 3개의 화재를 일컫는다. 먼저 1월 18일 오후 2시경 사찰 혼묘지에서 최초 발생한 화재는 20일 오전 2시에 진화되기까지 강한 서풍을 타고 약 5.3km에 이르는 곳을 잿더미로 만들고 수만 명의 인명피해를 발생시켰다. 두 번째는 19일 오전 10시경 사찰 덴주인에서 발생해 에도성을 집어삼키며 해안에 정박된 수많은 선박에까지 번져갔다. 세 번째는 20일 오전 8시 고지마치 상가에서 발생한 화재로, 50개 다이묘들의 대저택이 전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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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크게 3가지의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상사병을 앓다가 죽은 소녀의 옷을 혼묘지에서 태우다가 시작되었다는 전설, 다음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아베 타다아키의 저택에서 시녀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아베 가문이 가까이 있던 혼묘지에 이를 전가시켰다는 설, 끝으로 에도의 낡은 목조주택들을 과감하게 없애고 도시를 새롭게 개조하기 위해 막부가 일부러 방화를 했다는 설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근거는 부족하다.

이 3일에 걸친 발화의 과정에서 에도의 낡은 소방제도는 거의 대응을 하지 못했다. 지진이 잦은 탓에 목조건물이 90% 이상이었고 수많은 상인과 장인들을 수용하느라 다층의 연립주택들이 밀집되어 있어 번져나가는 불길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은 마치 기름을 부은 듯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에도를 휴지조각처럼 태워버렸다.

메이레키 대화재를 묘사한 그림, 1814|에도-도쿄 박물관 ⓒWikimedia)

이 불로 인해 에도의 60% 이상이 소실되었으며 사찰 350개, 교량 60개, 창고 9,000개가 타버렸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인명피해가 매우 컸다는 것이다. 문헌에 따라 적게는 3만 7천명, 많게는 10만 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 쇼군이던 도쿠가와 이에쓰나에 따르면 불에 타 신원을 확인할 수 없어 한 곳에 모아 매장한 시신의 수가 10만 8천여 구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는 에도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엄청난 희생이었다.

에도의 재건 사업과 사회에 미친 영향

화마가 지나간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에도막부의 결의는 단호했다. 화재 발생 직후 즉각적으로 쌀 900톤을 풀어 이재민에게 죽을 급식토록하고 재난 후 쌀 가격이 폭등하자 시중에 공급을 조절하며 쌀값을 동결시켰다. 특히 막부는 적극적인 재정지원을 실시해 큰 성과를 얻었는데, 재난을 당한 다이묘들에겐 은을 대출해 주어 10년간 상환토록 했고 신분에 따라 구제금을 배포해 어린 사람이나 병든 사람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수당을 지급했다. 이렇게 막부는 적극적인 구민·구호활동으로 민심을 안정케 한 뒤 숙원이었던 도시 재건사업에 집중하게 된다. 다시 태어날 에도의 핵심은 재난을 극복하고자하는 의지, 즉 방화에 중점을 둔 도시건설이었다

복원된 에도성. 지금은 일본 황궁으로 쓰인다. ⓒWikimedia

막부는 첫째, 도시의 외곽을 개발해 성 주변으로 집중되어 있던 사무라이 주택과 신사, 사찰을 이전 시켜 도시를 확장시켰다. 그렇게 확보된 빈 공간에 방화시설이나 화재완충지역으로 조성해 불이 번지는 것을 방지했다. 더불어 상가의 차양을 제거함으로써 4m에 가까운 도로 폭을 확보해 길 건너로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거리의 흐름을 원활히 해 재난 시 신속한 이동을 가능케 했다.

둘째, 더 이상의 목재 중심의 건축을 지양하고 내화건축 또는 내화 후처리를 독려했다. 이에 오두막이나 초가집과 같이 타기 쉬운 소재의 건축은 금지하고 사방의 벽을 흙과 회로 두껍게 바르게 했다. 그리고 초가지붕에는 흙을 여러 차례 바르게 하거나 아예 지붕을 판자를 씌우게 했다. 대화재 때 기와가 떨어져 많은 사람이 다쳤기에 기와지붕은 창고 외엔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방화건축의 도입은 1720년대까지 이어져 에도의 내화건축을 보편화 시켰다.

천수각은 복원되지 못하고 지금은 지지대만 남아있다.

셋째, 상인과 장인들의 거주지역을 확대하고 시가지의 권역을 확대해 화재에 대비하는 한편 도시성장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한 예로, 대화재 당시 스미다강은 군사적인 이유로 다리를 하나 밖에 설치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이에 스미다강을 사이에 두고 혼조와 에도 시내를 잇는 다리를 추가로 건설함으로써 상인과 장인들이 건너편인 혼조로 이주토록 했는데 이는 에도의 시가지를 넓혀 도심의 권역을 확장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넷째, 화재 발생 시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소방정책 및 소방체제를 개선시킴과 더불어 다양한 소방시설을 설치했다. 먼저 대화재가 발생한 이듬해인 1658년 정규소방조직인 정화소를 설립해 계획적인 훈련과 근무를 시행했으며 부교들에겐 당번을 정해 야번을 돌며 화재 감시와 치안 유지를 담당케 했다. 또한 화재를 감시하는 망루를 도심 곳곳에 설치하고 북서풍을 막기 위해 도심에 양 쪽으로 높이 7.2m에 달하는 방화둑을 쌓아 올렸다. 또한 히로코지라는 방화시설을 설치했는데 이는 차후 번화가로 발전하게 된다.

소방활동을 시행중인 정화소 ⓒWikimedia

메이레키 대화재 후 이러한 막부의 노력들은 당시만 해도 사무라이의 색체가 진했던 에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무엇보다 이러한 능동적인 후속 조치가 도심의 양적·질적 확장의 기초가 되어줌으로써 에도의 성장을 촉진시키게 됐다. 그 결과 에도는 1721년 인구 100만 명이 넘는 세계적인 거대도시로 도약하며 일본 수도로써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인구의 15% 이상이 사망하는 끔찍한 재앙 후 그들이 선택한 적극적인 대응은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는 돌파구이자 희망이라는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1657년 새해의 에도처럼, 2020년을 열어젖힌 벽두부터 전 세계는 코로나19라는 대화재에 큰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 사이 우리는 선도적인 방역과 솔선수범하는 현명함으로 이를 훌륭히 대응함으로써 세계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린 아직 이를 극복한 것은 아니다. 짧은 시간동안 큰 상처를 남겼던 메이레키 대화재와 달리 코로나19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잊지 못할 고통을 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우린 선택해야한다. 우리가 재난을 역사의 전화위복으로 승화시킨 1657년의 에도가 될지, 아니면 역사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이름 없는 영광의 도시가 될지를.

글. 최호철(소방안전플러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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