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대메뉴로 바로가기 바닥글 바로가기

100년의 세월을 넘어 개화기 거리를 거닐다
근대문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 전북 군산

마치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하다. 거리 한 켠에서 개화기 신여성과 모던보이가 갑자기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1930년대에 무역상사로 쓰였다는 일본식 목조주택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며 창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항구에서 울려 퍼지는 뱃고동 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곳곳에서 근대문화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도시, 군산만이 가진 매력이다.

낭만적인 분위기의 근대 건축에 담긴 비밀,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

군산이 자랑하는 근대문화거리는 기차역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도 30분이면 충분히 이동할 수 있다. 새만금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따라 갈매기들이 날개를 펴고 둥실 떠다니는 모습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시가지다. 곧이어 딱 봐도 요즘 건축 양식과는 느낌이 다른 건물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놀랍게도 근대기에 자리 잡아 약 100년 넘게 여기 머문 터주대감들이다.

옛 군산세관(좌)과 근대미술관(우)의 풍경

내항과 가장 가까운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근대건축물은 총 여섯 군데로, ▲옛 군산세관 ▲미즈카페(구 미즈상사) ▲근대미술관(구 일본 18은행) ▲근대건축관(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장미공연장(구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군산 제3청사 등이다. 이중 청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 거리에 집합해 있다. 기왕 속속들이 둘러보고자 한다면 근대역사박물관부터 들르자. 여기서 산 티켓 한 장으로 인근 시설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좌)에 가면 근대기 다양한 유물과 당시를 재현한 풍경(우)을 만나볼 수 있다

지역 역사를 두루 둘러볼 수 있는 박물관에서 각별히 일제강점기는 역사에 크게 관심 없는 이라도 울컥하게 하는 주제다.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뺏긴 후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을 서둘러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개항을 요구했고, 바닷길이 열리면서 아예 이곳을 전진기지로 삼아버렸다. 당시 수탈의 흔적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바로 그 근처에 있는 낭만적인 분위기의 건물들이다. 비록 지금은 아픈 역사의 자취로 인정하고, 더 나아가 대중을 위한 카페, 전시관, 공연장 등으로 개조해 이용하고 있지만, 원래 용도를 떠올린다면 전처럼 예사로이 보이진 않을 테다.

이곳의 장미는 꽃이 아니다?…무역상사를 개조한 카페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

장미공연장의 장미(藏米)는 수탈한 쌀을 모아두는 곳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군산이 배출한 인물로, 문학 교과서에선 빠지지 않는 작가 채만식은 소설<탁류>에서 어두운 시대에 휘말린 주인공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그려냈다. 이 작품 속 사람들을 개성적으로 묘사한 동상들이 서 있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장미공연장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 속 등장인물의 동상

장미라고 하면 대체로 꽃을 떠올리기 마련이겠지만, 이 이름은 그와는 매우 다르다. 쌀을 저장한다는 의미의 장미(藏米)로서 일본으로 보낼 미곡을 모아 두는 곳간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멀지 않은 거리의 장미갤러리 역시 같은 유래를 가지고 있다.

조선은행 군산지점을 그대로 재현한 근대건축관 내부(좌)와 해저에서 발굴한 동전들(우)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엔 대체 어느 정도로 가혹한 착취가 이뤄진 걸까. 그 답은 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던 근대건축관에 있다. 한쪽 구석, 높다랗게 쌓인 유리관 안에 꽉 차 있는 동전은 그러모은 재물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 사고로 배가 난파하면서 수중에 가라앉은 걸 발굴했는데도 산처럼 쌓였으니 전체 규모는 짐작조차 어렵다.

4~5명의 직원이 근무했다는 무역상사를 개조한 카페. 다다미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때 무역상사로 쓰였으나 이제는 커피 향기만이 감도는 미즈카페는 근대 상인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으로 내부가 좁고 다다미로 칸을 나눴는데 약 4~5명의 직원이 일했다고 한다. 지금은 군산을 찾은 여행객들의 사랑방으로 제 쓰임을 다하고 있다.

전국 3대 빵집 중 하나인 이성당부터 미군기지 스타일의 부대찌개까지

새로 오픈한 이성당 분점의 풍경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열심히 걸었으니 과연 출출할 법하다. 박물관과 진포해양테마공원이 있는 내항 부근에서 가장 가깝고도 유명한 맛집은 전국 3대 빵집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성당이다.

전국 3대 빵집으로 손꼽히는 만큼 맛있는 빵들이 즐비하다

도보로 약 10분 정도 걸리는데 대표 메뉴는 수제 단팥빵과 야채빵이지만, 보통 길게 줄 서 있어 구매가 쉽지 않다고. 본점 옆에 새로 개업한 분점이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빵 외에 다른 종류만 살 수 있다고 하니 참고하자.
시원한 국물을 원한다면 콩나물국밥이 제격이다. 전주에서도 유명하지만, 계란을 중탕해 따로 제공하지 않고, 갓 끓인 뚝배기에 바로 깨 넣어 찰랑찰랑하게 익히니 한결 부드럽게 넘어간다. 개운한 소고기뭇국이면 밥 한 그릇은 뚝딱이다. 1937년 김외과 병원으로 문 열었던 가옥을 고쳐 식당으로 쓰고 있다는 한일옥이 유명한 국밥집이다.
영화 <타짜>, <남자가 사랑할 때>, <시간이탈자> 등과 드라마<빛과 그림자>의 촬영지로 이름난 빈해원은 올해로 54년된 물짜장 집으로, 지난 2018년 시에서 문화재로 인정했다. 마치 중국 무술영화에 나올 법한 클래식한 감성이 눈길을 끈다.

부대찌개와 햄버거를 함께 즐기는 미군기지 스타일의 음식 조합

독특한 맛집으로는 비행장정문부대찌개가 있다. 군산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 식당은 과거 미군기지 가까이 있다가 자리를 옮긴 내력답게 동서양의 스타일이 오묘하게 섞인 메뉴로 알려져 있다. 간판에서 알 수 있듯 얼큰한 부대찌개를 기본으로 두툼한 패티의 햄버거를 주문해 함께 즐기는 게 정석이다.

영화<8월의 크리스마스> 속 주인공처럼 초원사진관에서 사진 한 장, 찰칵!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등장한 초원사진관

앞서 소개한 빈해원에서 알 수 있듯 군산은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한 바 있다. 특히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찍었던 초원사진관은 국내외 많은 영화팬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작품 배경은 서울이지만 실질적인 촬영은 이곳에서 했다고.

영화 속 장면들이 사진관을 찾은 여행객들을 반긴다

안에는 이를 증명하듯 배우 심은하가 역할을 맡은 주차 단속요원 ‘다림’과 배우 한석규가 분한 사진사 ‘정원’의 사진이 남아 있다. 또, 여주인공처럼 증명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을 배치했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등의 촬영지인 신흥동 일본식 가옥

일명 히로쓰 가옥으로 통하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영화<장군의 아들>, <타짜> 등에 나왔다. 드물게 상업으로 부를 쌓아 대지주에 올랐다는 일본인 히로쓰(広津)가 지은 2층짜리 목조주택으로, 원래는 안팎을 모두 개방했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더 이상 내부는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래된 집이고, 워낙 많은 여행객이 드나들어 안전 유지와 문화재 보호가 어려워지면서 내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사찰, 동국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가까운 데 있는 동국사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우리에게 낯익진 않지만, 근대기 일본의 영향을 받아 지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1909년 승려 우치다(內田佛觀)가 창건했으며, 유일하게 남은 일제강점기 사찰로, 과연 딱 봐도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절과는 다른 풍모가 느껴진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지만, 여전히 대웅전에서 불공을 드리고 있다고 하니 방문 시 방해가 되지 않도록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건 삼가는 게 좋겠다.

봄이 오자마자 꽃망울을 틔운 동국사의 매화

글 · 사진 ∣ 오민영(소방안전플러스 편집실)

top